해마다 12월이 되면 몸과 마음이 바빠져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섣달에 들어서면 꼭 집어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또 다시 일 년이란 세월이 돌아올 수 없는 과거 속으로 묻혀버리고 인생의 종착역이 한 걸음 더 다가왔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성탄절이 끼어있는 12월은 기쁜 달이기도 하다. 성탄의 의미 자체가 크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축적된 성탄절의 추억들을 뒤돌아 보노라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길이 헛되지만은 않았음을 느끼게 되면서 남은 삶의 여정을 그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탄절에 관한 나의 추억은 5살 때부터 시작된다. 그 해 성탄전야에 교회에서 돌아오신 할머니는 내일 새벽 성가대원들이 오면 대접할 것이라며 큰 솥에 팥죽을 쑤기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온다는 말에 흥분되기도 하고, 맛있는 팥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이 오면 꼭 깨워달라고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머니가 깨우기도 전에 난 문밖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듣고 일어나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호롱불을 밝혀 든 사람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성가가 끝나자 할머니는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준비한 팥죽을 대접했다. 뜨거운 팥죽 한 그릇씩을 먹고 나가는 그들에게 할머니는 다니면서 먹으라고 깨엿을 한 보자기 싸주셨다.


성탄절에 관한 나의 첫 기억은 이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맞이한 성탄절은 참으로 쓸쓸하고 서글펐다.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간 우리는 먼 친척이 경영하는 여관 2층에 임시로 거처를 정했다.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안 친척들이 하나 둘 모여들다 보니 4평밖에 안 되는 방에 20여 명이 앉아서 밤을 지내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찾아온 성탄절이었으니 누구의 마음도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촌 형이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쥐어준 카라멜 한 갑은 꽁꽁 언 내 마음을 조금은 녹여주었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는 마산 동 남편에 위치한 작은 포구 가포에서 맞았다. 어느 날 주린 배를 안고 밀려드는 푸른 파도와 그 위를 나는 물새들을 서글프고 처량하게 바라보며 바닷가에 서있는데 물탱크 몇 대가 올라오더니 그 안에서 미군들이 나와 해변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깡통을 따서 맛있게 먹는 그들을 보다 나도 모르게 그네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 통조림을 열심히 먹던 한 병사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내게로 와서 나를 물탱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탱크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한쪽에 수북이 쌓인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병사는 상자 하나를 열고 큰 깡통 하나를 꺼내 따주었다. 손짓으로 먹으라고 하면서. 씹을 사이도 없이 넘어가던 통조림 고기, 과자, 잼, 가루우유 등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맛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난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달 후에 다가올 성탄절 아침에 씨 레이숀 상자들을 가득 실은 물탱크 한 대를 선물로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대로 해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공산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그 많던 재산을 다 남겨놓고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오셔서 지금 휴전선 근처에 있는 금촌에 정미소 하나를 구입하셨다. 난 어머니가 막내인 동생을 출산하신 후 오래 입원해 계시는 동안 내 어머니가 되어주신 할머니와 그곳에 가서 며칠씩 지내곤 하였다. 


어느 날 멍석을 깔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 아주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데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면 주실까?”라고. 


“물론이지. 하나님은 네가 달라는 것을 다 주신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즉시 일어나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사는 집은 너무 오래되고 사람들이 많아서 싫어요. 예쁘고 나무 많은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아주 멋있고 좋은 권총도 하나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짧고도 간단한 기도였다. 그러나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기도이기도 했다.


그 기도를 한 며칠 후 할머니와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에서 기다리던 둘째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낡고 어둠침침하고 친척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어수선하여 정이 안 가던 집이 아니었다. 우리가 도달한 곳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27번지 “언덕 위의 나무 많은 집”이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금촌에 있는 동안 감나무, 잣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등 각종 과일나무들과 진달래, 무궁화, 개나리 등이 잘 어울리게 심어진 정원과 서구식 응접실을 포함하여 방이 8개나 있는 빨간 벽돌집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그 녹색의 장원 속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둘째 형이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뚜껑을 얼고 보니 속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것과는 상대도 안 되게 멋진 검은 색의 최신형 장난감 권총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금촌의 캄캄한 밤하늘 아래서 권총과 집을 달라고 한 5살 난 소년의 기도는 이처럼 완전하게 응답된 것이다.


이런 체험이 있는 나였기에 통조림을 가득 실은 물탱크를 성탄선물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월 24일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고 25일 새벽에 살며시 일어나 해변으로 뛰어나갔다. 바닷가 어딘가에 물탱크가 있을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나 넓은 바닷가는 텅 비어 있었고, 차디찬 겨울파도만이 몰려들고 있었다. 


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날 꼭 안아주었다. 할머니였다. “내 새끼야, 이 새벽에 왜 여기서 울고 있니?” (할머니는 언제나 날 “내 새끼”라 부르셨다). 나는 울먹이며 그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할머니는 날 더 꼭 안아주시며 “하나님이 네게 물탱크보다 더 좋은 선물을 주실 테니 들어가 기다리자.”고 말씀하셨다.


그날 오후 늦게 미군 트럭 하나가 좁을 시골 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집 쪽으로 달려왔다. 놀랍게도 그 트럭은 우리 집 돌담 앞에 멈추어 섰다.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와 미군병사 두 명이 트럭에서 내린 것이다. 군인들은 트럭 뒤에 쳐진 휘장을 걷어 올리고 씨 례이손 상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가 세든 집 마루에 쌓은 상자들은 수십 개가 넘었다. 


할 일을 마친 그들은 아버지와 악수를 나누더니 차에 타기 전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트럭이 떠난 후 아버지는 그들이 내가 귀엽게 생겼다고 하며, 즐거운 성탄절을 지내라고 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를 가포에 남겨놓고 무엇이든 일할 것을 찾기 위해 서울 쪽으로 가던 아버지는 오산에서 미군부대 앞을 지나게 되었단다. 미군 보초들이 더 이상 북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하자 아버지가 영어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신호상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하셨다.) 그가 서울 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부대장에게 데리고 갔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부대장은 통역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데 당분간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아버지는 그 부대에 머물며 통역을 담당하셨다. 


정식으로 통역장교가 부임해오자 부대장은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필요한 건 마산에서 굶주리는 가족들을 먹일 식량이라고 하자 부대장은 작은 트럭 한 대에 씨 레이숀을 가득 실어 병사들을 시켜 거기서 수백 키로나 떨어진 가포까지 가져다 준 것이다. 


그 트럭이 우리 집에 도착한 날이 그 해 성탄절 오후였고, 권총과 집을 달라는 5살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그로부터 4년 후 씨 레이손을 실은 물탱크를 원하는 그 아이의 간구를 씨 레이숀을 실은 트럭으로 바꾸어 응답해 주신 것이다.


그 후 마산에서 부산으로 거기서 또 서울로 그리고 캐나다로 삶의 거처를 옭기며 산 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탄절에 얽힌 추억들은 많기만 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 의미 있고, 그러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미군들을 통해 씨 레이숀 상자들을 보내주신 1951년 12월 25일이다. 


그날 난 하나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의 기도는 그의 시간에 그의 방법으로 반듯이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고, 늦게 시작한 내 목회의 지침이 되었다. 간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나 홀로 간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권총과 집과 씨 레이숀을 주신 후에도 내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를 여러 번 들어주셨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사람들마다 가슴 속에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깨달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인생의 경주를 달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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